绍兴有戏 ·
绍兴古城故事汇

众里寻她千百度,蓦然回首,却在绍兴古城故事汇。

— 中文 —

徐文长与利济桥

徐文长与利济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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利济桥,清乾隆《绍兴府志》有载。桥在小江桥以南的府河上,遗址在今利济桥直街西端。东西向三拼石梁桥,桥中间置石栏,旁为望柱,中有两个圆洞穿竹杆作扶栏,上世纪70年代被拆毁。

原先绍兴分为山阴、会稽两县,中间只隔一条分界河,叫做官河。分界河上横架着几座小桥,其中有一座叫“利济桥”,附近比较热闹,一直是两县百姓来往的交通要道。“山阴勿管,会稽勿收”的民谚便始于一件与徐文长有关的发生在这座桥上的故事。

有一年夏天,利济桥上忽然发现了一具无名尸体,百姓告到官府,要求验尸埋葬。谁知两知县却推来推去,互不负责,都说利济桥不是他们县的治辖。几天过去了,两县县衙还是迟迟不肯派人来验看尸首。这事不仅有碍交通,而且颇伤风化。人们怨声载道,却敢怒不敢言。这件事很快传到徐文长的耳朵里。他见两知县如此不负责任,激于义愤,马上用大幅红纸写了出卖分界河的招贴,张贴在利济桥畔。这张奇怪的招贴一张贴出来,顿时轰动了山阴、会稽两城。两县官得到消息,便赶来与徐文长对峙责问,在徐文长的责问下,县官自知无理,便只能草草将尸体收殓。

这个徐文长的故事传说,使绍兴利济桥的桥名提高了知名度,同时也延伸出一条名为“利济桥直街”的街道。

利济桥无名尸首收葬的事已经过去了几百年,但徐文长为百姓办的好事一直为后人所传诵。

— English —

Xu Wenchang and Liji Bridge

Xu Wenchang and Liji Bri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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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ji Bridge, originally located in the south of Xiaojiang Bridge and on Fuhe River diagonally opposite Xinhe Lane, is now located at the west of Liji Bridge Straight Street. The east-west three-piece Shiliang Bridge, with a stone fence in the middle and a watchtower beside it. It has two round holes through bamboo poles as handrails, which was demolished in 1970s.

Shaoxing was originally divided into two counties, Shanyin and Kuaiji, with only one boundary river between them, called Guanhe. There were several small bridges across the small boundary river, one of which was called "Liji Bridge", which was quite busy nearby, and has always been the main traffic artery between the people of the two counties. The folk proverb of "Don't try to manage Shanyin and Kuaiji" began with a story about Xu Wenchang that happened on this bridge.

One summer, a nameless corpse was suddenly found on Liji Bridge, and the people told the government to ask for an autopsy and burial. The two magistrate of a county were not willing to be in charge of this case. They all said that Liji Bridge is not the jurisdiction of their county. A few days later, the two magistrate still refused to send people to deal with the dead body. It not only made traffic jam, but also quite indecent. People complained about it, but didn’t dare to say. When Xu Wenchang heard that the two magistrates were so irresponsible, he was filled with rightous indignation. He immediately wrote a poster to sell the boundary river in big red paper and posted it on the bank of Liji Bridge. As soon as this strange poster was posted, it immediately caused a sensation in Shanyin and Kuaiji. When the two county officials got the news, they came to ask Xu Wenchang. Under Xu 's questioning, the county officials knew that they were unreasonable, so they had to collect the bodies hastily.

This story of Xu Wenchang has made Liji Bridge famous.Meanwhile, a street called "Liji Bridge Straight Street" was extended.

It has been hundreds of years since the burial of the nameless body at Liji Bridge, but the good things that Xu did for the people have been told by future generations.

— 한국어 공부 해요 —

서문장(徐文長)과 이제교(利濟橋)

서문장(徐文長)과 이제교(利濟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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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교(利濟橋)는 원래 소강교(小江橋) 남쪽, 신하롱(신하골목)(新河弄) 대각선 맞은편의 부강(府河)에 있었는데, 유적은 현 이제교직가(利濟橋直街: 거리 이름) 서쪽 끝에 있다. 동서로 세 개의 석량교(石梁橋)가 있는데, 다리 가운데에 돌난간을 설치하고, 옆에는 기둥이 있으며, 가운데 두 개의 동그란 구멍에 대나무 두개를 넣어 난간을 만들었는데, 1970년대에 허물어졌다.

원래 소흥은 산음(山陰), 회계(會稽) 두 현으로 나뉘었는데, 중간에 단지 하나의 강을 사이에 두고 경계를 나누었는데, 이것을 관하(官河)라고 불렀다. 이 강 위에 몇 개의 작은 다리가 가로 놓여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이제교"다. 다리 부근은 비교적 북적거리고, 줄곧 두 현의 백성들이 왕래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산음은 관리하지 않고, 회계는 거두지 않는다"는 속담은 서문장과 관련된 이 다리에서 일어난 이야기에서 시작되었다.

어느 해 여름, 이제교 위에서 갑자기 이름 없는 시체가 발견되었는데, 백성들이 관청에 신고하여 부검한 후 장례를 치르기를 원했다. 두 현관이 서로 이리저리 밀고 당기고, 책임지지 않으며, 모두 이제교가 자기 현의 관할구역이 아니라고만 말했다. 며칠이 지났지만, 두 현의 정부에서는 여전히 사람을 보내 시신을 부검하려 하지 않았다. 이 일은 교통에 지장을 줄 뿐만 아니라, 풍기에도 좋지 않았다. 사람들의 원성이 자자했지만 누구도 감히 화를 내고 말하지 못했다. 이 일은 곧 서문장의 귀에 들어갔다. 그는 두 현관들이 이렇게 무책임한 것을 보고 의분에 차서, 즉시 큰 붉은색 종이에 이 강을 판다는 내용의 글을 써서 이제교 옆에 붙였다. 이 이상한 글이 산음과 회계를 뒤흔들었다. 두 현관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 서문장과 찾아 문책하였는데, 서문장의 그들을 질책하자 현관은 스스로 억지스러움을 알고 대충 시체를 수습할 수밖에 없었다.

이 서문장의 전설은 소흥 이제교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하였고 동시에 "이제교직로"라는 거리도 생겼다.

이제교의 이름 없는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지낸 일은 이미 수백년이 지났지만, 서문장이 백성을 위해 앞장 선 이 사건은 후세에도 줄곧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 日本語 —

徐文長と利済橋

徐文長と利済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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利済橋は、元は小江橋の南、新河は斜め向かいの府河にあり、遺跡は現在の利済橋直街の西端にある。東西三本の石梁橋、橋の中間に石垣を置き、横に望柱、中に二つの丸い穴が竹柱を貫通して欄干になっていて、前世紀七十年代に取り壊された。

そもそも紹興は山陰と会稽の二つの県に分かれていたが、その間に分界川が1本隔てられていただけで、官河と呼ばれていた。分界川にはいくつかの小さな橋が横に架かっていますが、その中に「利済橋」という橋があり、付近は比較的にぎやかで、両県の人々が行き交う交通の要所となっていました。「山陰は管すべからず、会稽すべからず」ということわざは、この橋の上で起きた徐文長にまつわる話から始まった。

ある夏、利済橋の上で突然、無名の死体が発見され、庶民は検死と埋葬を求めて官庁に訴えた。ところが、両県は互いに責任を負わず、利済橋は自分たちの県の治轄ではないと言い張った。数日が過ぎたが、両県の県はまだ人をよこして死体を検査しようとしなかった。この事は交通を妨げているだけでなく、風俗をひどく害している。人々は不満の声を上げているが、あえて怒りを口にすることはできない。この事はすぐに徐文長の耳に入った。彼は両県の無責任さを見て憤慨し、すぐに分界河を売る旨を大きな赤紙で書いて利済橋のほとりに貼った。この奇妙な張り紙が張り出されると、たちまち山陰、会稽両城を騒がせた。両県官は知らせを受けると、駆けつけて徐文長とにらみ合って詰問した。徐文長に詰問されたため、県官は自ら理不尽と知り、死体をあっさりと納棺することになった。

この徐文長の物語や伝説は、紹興利済橋の橋名の知名度を高め、「利済橋直街」という通りも広がった。

利済橋の無名死体が埋葬されてから数百年が経ったが、徐文長が庶民のためにしたことは、後世の人々に語り継がれてき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