绍兴有戏 ·
绍兴古城故事汇

众里寻她千百度,蓦然回首,却在绍兴古城故事汇。

— 中文 —

清涼寺与清涼桥

清涼寺与清涼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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清乾隆《绍兴府志》载,清涼寺在绍兴城区飞来山(塔山)上。宋代重建。当时叫宝林寺,明、清两代均有修葺。现“清涼寺”系20世纪80年代修建。清涼桥本是一座无名小桥,横跨于应天塔与清涼寺之间的一条小河上,不仅是绍兴城内最小的桥,而且因其建于塔山的顶上,所以也是绍兴城内最高的桥。

相传,徐文长去拜访住在清涼寺的老友兴隆师傅,不想清凉寺的匾额被大风刮下,破损了。兴隆师傅正在难过发愁。徐文长一口答应帮兴隆师父再写一块。徐文长写得神采飞扬,当他写到第二个“涼”字时,他顿了顿微微一笑,而后很快完成了一幅大作。

兴隆看了感到十分不解,因为这涼字的中间一点,不够匀称。这样挂出去不仅不体面,且有损徐文长的名声。他婉转的向徐文长请教,徐文长却笑着说:“在下写此字的目的,就想要人们看后引起对此字的关注,同时又相互传播,说徐文长写了错字。这样,大家便会纷纷上山来观看,看的人多了,寺里的香火不就旺了吗?伢(我们)的目的不就达到了!”

兴隆和尚半信半疑的挂上牌匾,果然不出徐文长所料,人们你挤我涌,纷纷到寺院来烧香拜佛。如今清涼寺匾额是由时年九十三岁老人沈邁士先生在一九八三年中秋,根据徐文长先生当时的笔迹临摹而成。

— English —

Qingliang Temple and Qingliang Bridge

Qingliang Temple and Qingliang Bri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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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ingliang Temple was located on Feilai Mountain (also called Tashan Mountain), Shaoxing. In the early years, there were more than 20 houses there. But these houses gradually collapsed due to disrepair and were rebuilt in Song Dynasty (960–1127). There were repairs in Ming and Qing dynasties. Now Qingliang Temple was built by Shaoxing local government in 1980s. Qingliang Bridge used to be an unknown bridge over a small river between Yingtian Tower and Qingliang Temple, with Yingtian Tower in the north and Qingliang Temple in the south. It was not only the smallest bridge in Shaoxing, but also the tallest bridge as it was built on top of Tashan Mountain.

According to legend, Xu Wenchang paid a visit to Master Xinglong, an old friend who lived in Qingliang Temple. One day the plaque of Qingliang Temple was blown down by the wind and damaged. Master Xinglong was feeling sad and worried. Xu Wenchang promised to write another piece for Master Xinglong. Xu Wenchang wrote brilliantly. When he wrote the second word "cool", he paused and smiled. Then he quickly finished a masterpiece with a slight alternation.

Xinglong was puzzled because the middle part of this word cool was not well-proportioned. Hanging out this plaque was not only disgraceful, but also detrimental to Xu Wenchang's reputation. He tactfully asked Xu Wenchang for advice, but Xu Wenchang said with a smile, “The purpose of writing this word is to draw people's attention. They will spread the news to each other, saying that Xu Wenchang wrote a typo. In this way, everyone will climb up the mountain to check the reality. Thus, with more people coming, the incense will never cease in the temple. Then our purpose achieves.”

Xinglong hung up the plaque with a grain of salt. And everything did happen as Xu Wenchang expected. People crowded around and came to the temple to burn incense and worship Buddha. Today, the plaque of Qingliang Temple was copied by Mr. Shen Maishi, a 93-year-old man, according to the handwriting of Mr. Xu Wenchang in the Mid-Autumn Festival in 1983.

— 한국어 공부 해요 —

청량사(清凉寺)와 청량교(清凉桥)

청량사(清凉寺)와 청량교(清凉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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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사는 소흥 비래산(탑산) 위에 위치한다. 일찍이 20여 채가 있었으나, 후에 오랫동안 수리하지 않아 무너져 내려 송대(960-1127)에 이르러 재건하였다. 명청 두 시대에는 잘 수리하여 보존하였다. 현재의 "청량사"는 1980년대에 소흥 현지 정부가 자금을 조달하여 복구한 형태이다. 청량교는 원래 이름 없는 작은 다리이다. 이 다리는 응천탑과 청량사 사이의 작은 하천에 걸쳐있다. 북쪽은 응천탑에 접해 있고 남쪽은 청량사에 접해 있다. 소흥성 안에서 가장 작은 다리일 뿐만 아니라 탑산의 꼭대기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소흥성 안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다리이기도 하다.

명나라 유명한 서예가 서문장(徐文长)이 어느날 청량사에 사는 옛 친구 흥륭 스님을 찾아갔을 때 마침 청량사의 현판이 강풍에 떨어져 파손되는 것을 봤다고 전해진다. 흥륭(兴隆) 스님이 슬퍼하며 근심에 차 있자 서문장은 흥륭 스님을 위해 현판을 다시 써 주겠다고 하고서는 매우 의기양양하게 글을 썼는데, 그가 두 번째 "량"자를 쓸 때 살짝 웃더니 곧 대작을 완성했다.

하지만 흥륭은 그 글자를 보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涼’ 글자의 중간에 있는 점이 균형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현판을 내거는 것은 청량사의 체면이 서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서문장의 명성에 흠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서 문장에게 그 이유를 묻자 서 문장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쓴 목적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동시에 서문장이 글자를 잘 못 썼다는 것을 서로 전파하고자 하는 것이오. 그러면 모두들 산으로 올라가 구경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절의 향이 꺼지질 않을 것이니 이로써 우리의 목적은 달성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흥륭 스님은 반신반의하며 현판을 걸었는데, 과연 서문장의 예상대로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몰려들어 사원에 와서 향을 피우고 부처님을 향하여 절을 올렸다. 현재 청량사 현판은 1983년 중추절 노인 심만사(沈邁士) 선생이 93세의 나이에 서문장 선생의 당시의 필적을 모사하여 쓴 것이다.

— 日本語 —

清涼寺と清涼橋

清涼寺と清涼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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清涼寺は紹興の飛来山(塔山)の上にある。初期には20軒以上の家屋があったが、その後、老朽化のため徐々に倒壊し、宋代(960-1127)に再建された。明、清の2代とも修理されていた。現在の「清涼寺」は1980年代に紹興の地元政府が資金を集めて建設したものである。清涼橋は元来、応天塔と清涼寺の間の小川に架かる無名の小さな橋で、北は応天塔、南は清涼寺に面しており、紹興城内で最も小さい橋であるだけでなく、塔山の頂上に建てられているため、紹興城内で最も高い橋でもある。

言い伝えによれば、ある日、徐文長は清涼寺に住んでいた旧友の興隆和尚を訪ねた。しかし、前日、清涼寺の扁額が強風に吹かれて破損したので、興隆和尚は悩んでいるところだ。徐文長は興隆和尚にもう一つの扁額を書くことを承諾した。徐文長は非情に流暢に書き始めたが、二字目の「涼」の字を書く時、彼は少し笑って止まった後、すぐにこの扁額を完成した。

興隆は見ていてとても理解できなかった。この「涼」の中の点が少し均整がとれていなかったからである。このように持ち出すのは沽券にかかわるだけでなく、徐文長の名声を損なうことにもなる。彼は婉曲に徐文長に教えてもらうと、徐文長は笑ってこう言った。「この字を書く目的は、人々に見てこの字に対する関心を集めてもらいたいと思って、同時にまた互いに伝播して、徐文長が間違った字を書いたと言って、そうすればみんなは続々と山に登って見に来ることができて、寺の香火は絶えたくなるではないであろうか。さえ、私たちの目的は達成するではないであろうか。」

興隆和尚は半信半疑で扁額を掲げたが、案の定徐文長の予想通り、人々はあちこちに押し寄せて、次々と寺院に行って神仏に線香をあげ、叩頭する。今の清涼寺の扁額は、1983年秋夕、当時93歳の老人沈邁士先生が徐文長先生の筆跡をもとに模写したものであ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