绍兴有戏 ·
绍兴古城故事汇

众里寻她千百度,蓦然回首,却在绍兴古城故事汇。

— 中文 —

七贤殉难渡东桥

七贤殉难渡东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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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末清初(1645年),在清军铁蹄之下,各地汉族纷纷举起反清义旗,起来反抗。在绍兴有不少文人志士,宁死不肯剔发结辫,不为清朝做事。明末状元余煌及潘集、董垣、朱玮、郑之尹、周卜年、高岱寻,相继投水自沉渡东桥,七贤殉难,即为其中一例。

在今延安中路东面,先前有一座石拱桥,名曰:“渡东桥”,因原桥年代久远而坍塌,后在遗址上重建。在桥的南首有一座祠庙,叫“七贤祠”,里面供奉着七尊塑像,是人们为纪念这七位贤士所建。

据传,清朝刚建立的初年,有七位志同道合的朋友,原本都是明朝的臣民,明朝政权被推翻后,他们绝不屈服于满清政府的统治。经过商议,定于次日傍晚在渡东桥头汇合,打算在船上饮酒吟诗后投河自尽。然而,七人中有一人没有按时来赴约。于是,六人便先到船上各自签名后,开始饮酒吟诗,书写檄文。

在旁为他们撑船的船头脑见此壮烈场面,十分感动。于是,恳求参加他们的行动。六人见此,将伸明大义的船头脑视为知已。狂欢畅饮后,七人一齐跳入江中,以此向满清政府作出最后的抗议。

原来这天傍晚正要赴约的那人刚想离开家时,他的儿子不小心将手骨的臼给扭出了。当他处理好家务,赶到渡东桥时,七人已壮烈殉难,周围百姓已将遗体打捞上岸,他悲痛欲绝。

不久,七人殉难的事很快就传开了。人们为了纪念他们这种爱国的民族精神,自发捐资建祠塑像。并把他们树立为“圣贤”,将祠取名为“七贤祠”。

— English —

Martyrdom of Seven Sages in the Du Dong Bridge

Martyrdom of Seven Sages in the Du Dong Bri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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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late Ming and early Qing Dynasty (1645), Han people all over the country raised the anti-Qing flag and rose up to resist the iron hoof of the Qing army. There were many scholars in Shaoxing who would rather die than cut their hair and braids to serve the Qing Dynasty. The martyrdom of the seven sages in the Du Dong Bridge was one of the stories.

In the east of Yan 'an Middle Road, there was a stone arch bridge named Du Dong Bridge. It collapsed due to the old age and was rebuilt on the site. In the south of the bridge, there was a temple called Seven Sages Temple enshrined seven statues inside. The temple was built by local people to commemorate these seven sages.

It was said that in the early years of the Qing Dynasty, there were seven like-minded friends who were subjects of the Ming Dynasty. After the regime of Ming Dynasty was overthrown, they never gave in to the rule of Qing government. After much deliberation, they scheduled to meet at Du Dong bridge the next evening. They planned to drink and sing poems on the boat and then throw themselves into the river. However, one of the seven people did not arrive on time. Therefore, six people signed their names first, and then started drinking and singing poems and writing essays.

The owner of the boat, who was punting for them, was very moved to such a heroic scene. Therefore, he begged to participate in their actions. They took the boatman as a confidant. After the revelry, seven people jumped into the river together to make a final protest to the Qing government.

It turned out that the man who was going to keep the appointment that evening was delayed by some chores. He was just about to leave home when his son accidentally had a dislocation in his hand. When he handled this and arrived at Du Dong Bridge, seven people had thrown themselves into the river. He was devastated when these local people were salvaging their bodies.

Soon, the story of the martyrdom of seven people spread around. In order to commemorate their patriotic national spirit, people spontaneously donated money to build temple and statues. And people called them seven sages and named the temple Seven Sages Temple.

— 한국어 공부 해요 —

칠현(七贤)의 도동교(渡东桥)에서의 순교

칠현(七贤)의 도동교(渡东桥)에서의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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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말 청초(1645년), 청나라 군대의 잔혹한 핍박 하에 각지의 한족(汉族)들이 잇달아 반청기(反清旗)를 들고 저항하였다. 소흥에서도 많은 문인과 지사들이 죽을지언정 변발을 하지 않고 청 조정을 위해 일을 하지 않았다. 칠현이 도동교에서 순교한 사건도 그 중의 한 사례이다.

지금의 연안중로(延安中路) 동쪽에 도동교라는 아치형 돌다리가 있었다. 원래의 다리는 오래되어 무너졌다가 후에 옛 모습대로 옛서 재건되었다. 다리의 남쪽에 "칠현사(七贤祠)"라고 불리는 사당이 있는데, 그 사당 안에 7개의 조각상을 모시고 있다. 사람들이 이 7인의 현인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전해 내려오는 설에 따르면, 청나라 원년 뜻을 같이하는 일곱 명의 친구들이 있었는데, 원래는 모두 명나라의 신하들이었고, 명나라 정권이 망한 후 그들은 결코 만청 정부의 통치에 굴복하지 않았다. 상의를 거쳐 다음날 저녁 도동교에서 합류하기로 하고, 배에서 술을 마시고 시를 읊은 후 강에 투신하여 자결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일곱 명 중 한 명이 약속 시간에 제때 오지 않았다. 그래서 여섯 사람은 먼저 배에 가서 각자 서명한 후에 술을 마시고 시를 읊고 격문을 쓰기 시작했다.

옆에서 배를 저어주던 뱃사공이 이 장렬한 장면을 보고 매우 감동받았다. 그래서, 그들의 행동에 참가할 것을 간청했다. 여섯 사람은 대의를 밝히는 이 사람을 자기로 받아들이고 함께 거나하게 술을 마신 후 일곱 사람은 일제히 강물에 뛰어들어 청나라 정부에 최후의 저항을 하였다.

알고보니 이날 저녁에 오지 못한 그 사람은 막 집을 나서려고 할 때, 그의 아들 절구에 손뼈를 상하였다. 그가 집안일을 처리하고 도동교에 도착했을 때는 일곱 명이 이미 장렬하게 숨을 거둔 뒤였으며 주위의 백성들이 이미 시신을 뭍으로 건져낸 후였다. 그는 그 장면을 보고 침통해 마지 않았다.

곧 이 7인이 강에서 희생했다는 사실이 널리 퍼졌다. 사람들은 그들의 이런 애국적인 민족정신을 기념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자금을 기부하여 사당과 조각상을 세웠다. 그리고 그들을 "성현(圣贤)"으로 세우고 사당을" 칠현사(七贤祠)"라 이름지었다.

— 日本語 —

七賢殉難東橋渡り

七賢殉難東橋渡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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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末清初(1645年)、清軍の鉄蹄の下で、各地の漢民族が次々と反清義旗を掲げ、反抗した。紹興には多くの文人志士がいたが、死んでも髪をきれいに結うことを拒み、清朝のために仕事をしなかった。渡東橋七賢の殉難は、その一例である。

現在の延安中路の東には、以前「渡東橋」という石造のアーチ橋があったが、元の橋が長い年月をかけて崩落した後、遺跡で再建された。橋の南の端には「七賢祠」という祠があります。そこには7人の像が祀られていて、この7人の賢士を記念して建てられた。

清朝が成立した当初、7人の同志がいたが、もともとは明の臣民であり、明の政権が倒された後も、満清政府の支配に決して屈しなかったと伝えられている。相談の上、翌日の夕方に渡東橋のたもとで合流し、船で酒を飲んで詩を詠んで川に身を投げようとした。だが、7人のうち1人は約束通りに来なかった。そこで、6人は船に着いてそれぞれ署名した後、酒を飲んで詩を詠み、檄文を書いた。

そばで彼らを支えていた船頭は、この壮絶な場面を見て感動した。そこで、彼らの行動に参加してほしいと懇願した。これを見た六人は、大義を開いた船の頭脳を知とした。お祭り騒ぎの後、七人はいっせいに川の中に飛び込んで、満清政府に最後の抗議をした。

その日の夕方、約束の人が家を出ようとしたとき、息子がうっかり手の骨の臼を捻ってしまったのだ。家事をこなして渡東橋に駆けつけた時、7人は壮絶に殉死し、周囲の人々は遺体を引き揚げていた。彼は悲嘆にくれた。

やがて、七人が殉難したことはすぐに広まった。人々は彼らのこのような愛国的な民族精神を記念するために、自発的に寄付して祠の塑像を建てます。そして彼らを「聖賢」と立て、祠を「七賢祠」と名付け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