绍兴有戏 ·
绍兴古城故事汇

众里寻她千百度,蓦然回首,却在绍兴古城故事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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草藐的来历

草藐的来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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草藐,在宋代以前称为“草貌”。在城垣之外。俗语常把征税之所用“貌”来称之。又其址位于草木茂盛的郊外,故名草貌。宋宝庆《会稽续志》记载:“旧传此地在州城外,俗谓征税之所为貌,以在郊,故曰草貌。”

绍兴古城是由春秋於越的句践小城和山阴大城合成的。隋文帝开皇年间,越国公杨素将范盐修筑的山阴大城,加扩至周二十四里二百五十步,名日“罗城”。同时在原有句践小城的基础上扩建周十里的子城。这个城市规模沿袭到宋代,几乎没有什么变化。也就是说,自隋代杨素建立罗城后,“草貌”之地即位于州城之内了。

公元276年,会稽郡遭遇荒旱之灾,会稽郡太守车浚为人清忠,上表请求东吴国王孙皓赈济,并停交“算缗”。荒淫暴君孙皓却说车浚是在树立个人威信,将其处死。由此可见朝廷税法之严酷。六朝时,税役繁多。当时的越州城外即有税官在此,草貌之名由此而得。到宋代,昔日草貌之地已在城内,“草貌”成了府城内的坊名。从明代始,草貌之坊名消失。此后,将原草貌坊区域内的桥、河、田野路等均以草貌之名冠之,如草貌桥、草貌畈、草貌弄等。民国时候,误将“草貌”写成了“草藐”,并一直沿袭至今。

赋税徭役是封建君主专制下的产物,常常使得百姓遭受多重盘剥。置身局弄,感受历史,借古鉴今,面向未来,这些历史印记不单单承载着民间的记忆,还可以让我们从中吸取经验和教训。

— English —

The origin of Caomiao

The origin of Caomia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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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omiao was called "Caomao" before the Song Dynasty. In ancient times, it was located outside the city wall of Yuezhou. As the saying goes, taxation is often referred to as "Mao". And its site is located in the outskirts of lush vegetation, hence the name "Caomao". Song Jiatai’s "Kuaiji Zhi" records: "It was said that this place was outside the state city, and it was said that the place where taxes were collected, so the name was called “Caomao”.

The ancient city of Shaoxing is composed of the small city of Goujian and the great city of Shanyin. During the reign of Emperor Wen of the Sui Dynasty, the Grand City of Shanyin built by Fan Yan by Yang Su of the State of Yue added to 24 miles and 250 steps, which was named "Luocheng" on Tuesday. At the same time, on the basis of the original Goujian town, the Zhoushili sub-city was expanded. The size of the city remained almost unchanged until the Song Dynasty. That is to say, since the establishment of Luocheng by Yang Su in the Sui Dynasty, the land of "Caomao" has been located within the state city.

In 276 AD, Kuaiji County suffered a drought, and the prefect Che Jun of Kuaiji County was very loyal. The King of Sun Hao was relieved and stopped the payment. Sun Hao, the desolate tyrant, said that Cha Jun was establishing personal prestige and executed him. This shows the harshness of the imperial tax law. During the Six Dynasties, there were many tax duties. At that time, there were tax officials outside the city of Yuezhou, and the name of “Caomao” was derived from this. In the Song Dynasty, the former place of grass was already in the city, and "Caomao" became the name of the town in the city. From the beginning of the Ming Dynasty, the name of “Caofeng” disappeared. Thereafter, the bridge, river and field road in the original area of Caomangfang are crowned by the name of “Caomangfang”, such as “Caomang Bridge”, “Caomang Fan”, “Caomang Lane”, etc. In the Republic of China, "Caomao" was mistakenly written as "Caomiao", and it has been followed to this day.

Taxation is a product of the feudal monarchy, which often causes the common people to suffer multiple exploits. Being in the situation, feeling the history, learning from the past, and facing the future, these historical imprints not only carry the memory of the people, but also let us draw lessons and experiences from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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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막의 유래

초막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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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막(草藐)은 송나라 이전에 "초모(草貌)"라고 불렸다. 고대에 이곳은 월주의 성 밖에 위치해 있었다. 속어로 흔히 세금을 징수할 때 "모(貌)"로 칭한다. 또한 그 위치는 초목이 우거진 교외에 있기 때문에 초모라고 불렸다. 송가태의 "회계지"에서는 "전해진 바로는 이곳은 주성 밖에 있는데, 속칭 세금을 징수하는 곳의 모라고 하는데 교외에 있기 때문에 초모라고 불린다"고 기록하였다.

소흥고성은 춘추와 월대의 구천소성(句踐小城)과 산음대성(山陰大城)을 합한 것이다. 수나라 문제 개황 시대 월국공 양소는 범염(凡鹽)이 축조한 산음대성을 24리 250보까지 확장하여 "나성(羅城)"이라고 불렀다. 동시에 원래의 구천소성의 기초 위에 주위 10리의 자성을 증축하였다. 이 도시의 규모는 송대까지 그대로 남아 거의 변한 것이 없다. 즉, 수나라 때 양소가 나성을 세운 후부터 "초모"의 지역은 바로 주성 안에 위치하게 되었다.

서기 276년, 회계군이 기근과 가뭄을 겪자 청렴하고 충성하기로 유명한 회계군 태수 차준(車浚)은  동오왕 손호에게 구휼을 요청하는 상소와 함께 상인들과 수공업자들의 세금을 면제해 줄 것을 요구했다. 방탕한 폭군 손호는 차준이 개인의 위신을 세우고 있다며 그를 처형했다. 이것만 보아도 당시 조정의 세납법의 가혹함을 알 수 있었다. 육조 시대에 와서는 내야 할 세금이 더 많아졌다. 당시의 월주 성 밖에 세관이 있었는데, 초모라는 이름은 여기서 얻어진 것이다. 송대에 이르러, 옛날의 초모골목은 이미 성내에 있어서, "초모"는 부성 내의 골목 이름이 되었다. 명나라 때부터, 초모라는 이름은 사라졌고 그 후 원래 초모관내 다리, 강, 길 등은 모두 초모라는 이름으로 초모교, 초모밭, 초모골목 등으로 이름을 달았다. 민국 시기에 와서 "초모(草貌)"를 "초막(草藐)"으로 잘못 써서 지금까지 그렇게 불려오게 되었다.

세금과 부역은 봉건 군주의 전제하의 산물로, 종종 백성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착취에 시달리게 한다. 이 역사의 흔적들은 민간의 기억만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들로 하여금 경험과 교훈을 얻을 수 있게 한다.

— 日本語 —

草藐の由来

草藐の由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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草藐は、宋代以前は「草貌」と呼ばれていた。古代においては、越州の城壁の外に位置していた。税金を取ることを「貌」と呼ぶことが多い。また、草木の生い茂る郊外にあることから、草木と呼ばれている。宋嘉泰の『会稽志』には、「旧伝この地は州城外にあり、俗には徴税の所為と称し、これ以郊外にあり、故に草貌と呼ばれている」と記されている。

紹興古城は春秋越の句践小城と山陰大城を合成したものである。隋文帝の開皇年間、越国公楊素は範蠡が築き上げた山陰の大城を、周二十四里二百五十歩に拡張し、「羅城」と名づけた。また、もとの句践小城の基礎の上に拡張して周十里の子城。この都市の規模は宋代まで踏襲され、ほとんど変わっていない。つまり、隋代に楊素が羅城を建ててから、「草形」の地は州城の中にあったのだ。

西暦276年、会稽郡は干ばつの被害に遭い、会稽郡の太守車浚は人柄が清忠であり、東呉の王孫皓に表を送り救援を求めて、そして郡内税金の中央送りをやめた。淫行暴君の孫皓は、車浚が個人的な威信を確立していると言って処刑した。朝廷の税法の厳しさがわかった。六朝の時、税役は非常に多かった。当時の越州城外に税官がいたことから、草形の名がついた。宋代になると、昔の草顔の地はすでに城内にあり、「草顔」は府城内の坊名になった。明代から草貌の坊名は消えた。その後、原草貌坊区域内の橋、川、田野路などをすべて草貌の名で冠し、例えば草貌橋、草貌広い、草貌弄などとした。民国の時、「草貌」を誤って「草藐」と書き、現在に至っている。

賦役は封建君主専制のもとで生まれた産物であり、しばしば民に多くの搾取を受けさせた。身を置いて、歴史を感じ、古を借りて今を鑑とし、未来に向かう。これらの歴史の印は単に民間の記憶を載せるだけでなく、われわれにその中から経験と教訓を学ばせることができ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