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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波弄与春波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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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波桥位于沈园西首,原名罗汉桥,后才改称春波桥。南面的弄堂便是春波弄。桥的正北原本正是绍兴城内八大寺院之一禹迹寺。后来寺废,马路拓宽,只剩下“禹迹寺古井”,已立碑保护。
当初,禹迹寺南面并无石桥,家住南面的许多香客被这小河一挡要绕道多走很远才能来到寺院烧香拜佛。他们曾多次向老方丈请求建一座桥,以方便众多香客的往来。一天,老方丈在负责建桥的和尚陪同下,来造桥现场察看。石匠们见老方丈到来,趁机请老方丈取个桥名。老方丈笑呵呵地道:“伢这寺院内有五百尊罗汉,就叫它‘罗汉桥’吧。”
石匠们和围观的人们听了后,都很认同。于是,老方丈挥毫写下“罗汉桥”三个大字,请石匠师傅们将它刻凿在桥栏石上。
南宋庆元二年(1196),陆游一位好友来到禹迹寺内隐居。一天,陆游在看望这位昔日的好友后,登上禹迹寺的二楼,遥望斜对面的沈园,沉思了良久。然后他走出禹迹寺,漫步来到罗汉桥头,回想起当年与唐琬曾站在此桥上,一起观赏桥下游鱼嬉水的欢乐情景。这使他触景生情,陈年往事一下涌上心头。这时陆游诗兴已起,随即作《沈园》七绝诗一首,诗曰:
城上斜阳画角哀,沈园非复旧池台。
伤心桥下春波绿,曾是惊鸿照影来。
不久,这首诗便在民间流传开了。罗汉桥甚至相连的弄堂也在不知不觉中被改名为春波桥和春波弄。
— English —
Chunbo Lane and Chunbo Bri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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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nbo Bridge is located at the west end of Shenyuan Garden. It was originally named Luohan Bridge and later renamed Chunbo Bridge. The lane to the south is Chunbo Lane. The north of the bridge was originally Yuji Temple, one of the eight major temples in Shaoxing City. Later, the temple was abandoned as the road was widened, leaving only the " Ancient Well of Yuji Temple", which had been erected a monument for protection.
At the beginning, there was no stone bridge to the south of Yuji Temple. Many pilgrims who lived in the south were blocked by the small river and had to take a long detour to come to the temple to burn incense and worship Buddha. They had repeatedly asked the old abbot to build a bridge to facilitate pilgrims. One day, the old abbot, accompanied by the monk in charge of building the bridge, came to inspect the bridge building site. Seeing the old abbot, the stonemasons took the opportunity to ask the old abbot to name the bridge. The old abbot smiled and said: "There are five hundred arhats in this temple, so let’s call it ‘Arhat Bridge’.”
The stonemasons and the bystanders agreed. Therefore, the old abbot wrote "Arhats Bridge" and asked the stonemasons to carve it on the bridge stone.
In the second year of Qingyuan in the Southern Song Dynasty (1196), a friend of Lu You came to Yuji Temple to live in seclusion. One day, after visiting this friend, Lu You went up to the second floor of Yuji Temple, looked at the Shen Garden diagonally opposite, and pondered for a long time. Then he walked out of Yuji Temple and strolled to the Arhat Bridge. He recalled that he had stood on this bridge with Tang Wan and watched the joyful scene of fish playing in the water under the bridge. This made him feel emotional, and brought back old memories to him. At this time, Lu You's poetic interest was already rising, and he immediately composed a poem entitled "Shen Garden". The poem said:
“The slanting sun on the city draws a corner of sadness, and the Shen Garden no longer has that pool.
Under the sad bridge, the spring waves (Chunbo) were green, and the beautiful memory was flashing back.”
Soon, the poem spread among the people. Arhat Bridge and even the adjacent lanes were unknowingly renamed Chunbo Bridge and Chunbo Lane.
— 한국어 공부 해요 —
춘파롱과 춘파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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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원 서쪽에 위치한 춘파교(春波橋)의 원래 명칭은 나한교(羅漢橋)였다가 나중에야 춘파교(春波橋)로 바뀌었다. 춘파교 남쪽의 뒷골목이 바로 춘파농이다. 다리의 북쪽 정면은 원래 소흥성 내 8대 사찰 중 하나인 우적사였다. 이후 절이 폐사 되고 길이 넓어지면서 '우적사옛우물'만 남아 비석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당초 우적사 남쪽에는 돌다리가 없어 남쪽에 사는 많은 참배객들이 이 하천을 따라 한참을 돌아가야만 절을 찾아 참배를 올릴 수 있었다. 그들은 수많은 참배객들이 쉽게 오갈 수 있도록 주지 스님께 다리를 세워 달라고 여러 차례 요청했다. 어느 날 주지 스님이 다리 건조를 책임지고 있는 스님과 함께 다리 건설 현장을 살피러 왔다. 석공들은 주지 스님이 오신 김에 다리 이름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다. 주지 스님이 웃으며 “이 사원에 나한이 500명이나 있으니 나한교라 불러라.” 라고 하였다. 석공들과 구경꾼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하여 주지 스님은 '나한교(羅漢橋)'라고 크게 세 글자를 쓰고 석공들을 불러 다리 난간에 새기게 하였다.
남송 경원 2년(서기 1196년) 남송의 애국 시인 육유(陸遊)의 한 지인이 우적사 경내에 은거하였다. 어느 날 육유는 옛 친구를 만난 뒤 우적사 2층에 올라 비스듬히 마주보고 있는 심원을 바라보며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그런 후에 그는 우적사를 나와, 나한교로 천천히 걸어갔다. 머리 속에는 전 부인 당완과 함께 이 다리 아래 물놀이를 즐기던 당시의 추억으로 가득했다. 추억의 감상에 젖으니, 해묵은 일들이 한꺼번에 마음속에 떠올랐다. 그 때 육유는 시흥에 심취 되어 《심원(沈園)》이라는 칠절시(七絶詩)를 지었다.
성 위로 해 기우니 뿔피리 소리 슬프구나, 심원의 연못과 누대도 옛 모습이 아니구나.
슬프게도 그 다리 아래 봄 물살은 푸른데, 일찍이 돌아온 놀란 기러기 그림자 그 곳에 어리었네.
곧 이 시는 민간에 널리 퍼져나갔다. 그후 나한교는 물론 옆에 연결 된 골목도 언제부터인지 이름이 바뀌어 육유의 시에 나오는 푸른 물결이라는 뜻의 “춘파” 두 글자를 따 춘파교와 춘파롱으로 불리게 되었다.
— 日本語 —
春波弄と春波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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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波橋は沈園の西の首に位置し、元の名前は羅漢橋で、後に春波橋と改称した。南の小路は春波弄である。橋の真北はもともと紹興城内の八大寺院の一つである禹跡寺だった。その後、寺は廃止され、道路は広くなり、「禹跡寺古井」だけが残ったが、すでに碑が建てられて保護されている。
当初、禹跡寺の南側には石橋がなく、南側に住んでいた多くの参拝客が、この小川に遮られて遠回り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多くの香典客が行き来しやすいように橋を造ってほしいと何度も年老いた方丈にお願いしたことがある。ある日、老住職は、橋を作る担当の和尚さんに付き添われて、橋作りの現場を見に来た。石工たちは老師が来るのを見て、この機会に老師に橋の名前をつけてもらった。「さえこの寺には羅漢が五百体もあるから、『羅漢橋』と呼ぼう」と、じいさんはにこにこしていた。
石工さんたちも見物の人たちもそれを聞いて、納得していた。そこで老じいさんは「羅漢橋」という三つの大きな文字を揮毫して、石工の職人たちにそれを橋の欄干の石に彫ってもらった。
南宋慶元2年(1196)、陸游の友人が禹跡寺内に隠居した。ある日、陸游はこの昔の親友を訪ねた後、禹迹寺の二階に登り、斜め向かいの沈園を眺めてしばらく考えこんでいた。それから、禹迹寺を出て羅漢橋のたもとまで歩いてきた。この橋の上に立って、橋の下で魚が泳いでいるのを見ていた当時のことを思い出した。これは彼をその場に臨んで情感を生み、昔のことが一度に心に浮かんだ。このとき陸游の詩興が起り、すぐに『沈園』の七絶詩が一首作られた。詩曰く:
城の上の斜陽画角哀、沈園は古い池台ではない。
傷心の橋の下に春の波の緑、かつて驚きの光が影を照らしてきた。
やがてこの詩は民間に広まった。羅漢橋がつながっていた小路までもいつの間にか春波橋や春波弄と改名されていた。